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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리앗 앞에 선 다윗, 민사소송을 시작하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 민사소송을 시작하다

    골리앗과의 싸움! 민사소송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가장 먼저 걱정한 사람들은 가족이었습니다.

    제가 소송을 하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가족들이 가장 먼저 물었던 것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변호사 비용은 어떻게 하려고?”

    그 말을 듣고 보니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상대방은 개인이 아니었습니다.
    거대한 증권사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변호사를 선임해야 할 것 같았고, 변호사를 선임하려면 적지 않은 비용이 필요했습니다.

    이미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또다시 큰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의 걱정은 당연했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정말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상대방이 얼마나 강하게 나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법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도 아닌데 혼자 소송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습니다.

    저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겪은 일이 정말 잘못된 일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끝까지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정말 사실인지, 내가 가진 증거가 법정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그리고 이 사건을 법은 어떻게 판단하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나 홀로 민사소송을 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앞에는 하나의 거대한 산이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골리앗과 다윗

    성경을 읽다 보면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골리앗은 거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모습만 보아도 상대방의 마음을 위축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전쟁의 전문가도 아니었고, 거대한 무기를 가진 장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골리앗을 보면서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의 크기만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저에게도 비슷한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민사소송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가족들은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걱정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피고인 증권사에서 준비서면을 보내왔고, 재판에 대응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내세운 것은 대형 로펌이었습니다.

    변호인은 무려 네 명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습니다.

    “혼자 소송하는데 상대방은 변호사가 네 명이나 된다고?”

    그 말을 듣고 있으면 누구라도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상대방은 거대한 증권사였고, 그 뒤에는 대형 로펌과 여러 명의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혼자였습니다.

    객관적으로만 보면 너무나 불리해 보였습니다.

    마치 거대한 골리앗 앞에 작은 다윗이 서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오히려 담담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86421

    상대가 커질수록 마음은 더 담담해졌다

    가족들은 상대방의 규모를 보면서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때부터 더 차분해졌습니다.

    왜였을까요?

    아마도 처음부터 제가 이 싸움을 사람과 사람의 힘겨루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제가 경험한 일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제가 가지고 있는 증거를 하나씩 정리하고,
    상대방의 주장에 사실관계가 맞는지 살펴보고,
    법원에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성실하게 설명하는 것.

    그것이 제가 할 일이었습니다.

    상대방에게 변호사가 몇 명인지, 얼마나 큰 로펌인지, 얼마나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는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면 되었습니다.

    저는 제 사건을 하나씩 공부했습니다.

    문서를 다시 읽고, 날짜를 확인하고, 증거를 살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법률 용어 하나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씩 알아가기 시작하니 조금씩 길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송은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결국 자신의 주장을 얼마나 사실과 증거로 설명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싸움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법률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더 조심했습니다.

    모르는 것은 찾아보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렇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나는 혼자다”라는 생각을 내려놓다

    상대방이 대형 로펌을 선임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처음에는 저도 잠시 생각했습니다.

    ‘정말 내가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질문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미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은 포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제가 지금까지 이 소송을 끌고 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저는 혼자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정말 혼자였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법원에 제출할 서류를 준비할 때도, 상대방의 준비서면을 읽을 때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할 때도 하나님께 계속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알게 해 주세요.”

    “제가 감정적으로 판단하지 않게 해 주세요.”

    “제가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게 해 주세요.”

    “그리고 결과가 어떠하든 이 과정을 통해 제가 하나님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해 주세요.”

    저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방보다 더 큰 힘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다윗에게도 골리앗보다 더 큰 무기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거대한 상대 앞에서 내가 배운 것

    돌이켜보면 상대방이 대형 로펌을 내세웠던 순간은 오히려 제게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상대방의 크기를 바라보기보다 제가 해야 할 일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변호사가 네 명이다.”

    “대형 로펌이다.”

    “상대방은 거대한 증권사다.”

    이런 사실들이 처음에는 크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실들이 제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얼마나 큰지는 제가 할 일을 대신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여전히 하나였습니다.

    끝까지 진실을 확인하고, 제가 가진 증거를 성실하게 제시하는 것.

    그리고 결과는 법원에 맡기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게 가르쳐 주시는 또 하나의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골리앗처럼 거대한 문제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문제 앞에서 자신이 너무 작아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크기가 우리의 믿음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거대한 문제를 만났을 때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결과를 알지 못합니다.

    8월 18일, 법원에서 어떤 판결이 내려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처음에는 상대방의 크기가 보였습니다.

    그다음에는 제 자신의 부족함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혼자 싸우는 것처럼 보였던 그 길에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골리앗이 아무리 커 보여도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골리앗의 크기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를 바라보고 있느냐였습니다.

    저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대한 증권사와 대형 로펌, 네 명의 변호인단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정직하게 제 길을 걸어갈 수는 있었습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내가 해야 할 몫은 끝까지 감당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제가 민사소송을 통해 배우고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골리앗이 커질수록 다윗이 더 위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야말로,

    내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다시 확인해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 민사소송의 길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흔적

    민사소송의 길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흔적

    신실하신 하나님

    반대매매가 일어나기 사흘 전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자리에 앉아 준비하고 있는데, 마음에 아주 강하게 들어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살려 달라고 기도해라.”

    얼마나 강하게 마음에 와닿았는지 조금은 당황스러웠습니다.

    당시에도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말씀을 현재의 상황과 연결해서 생각했습니다. 주식과 관련된 말씀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나 혼자 가지고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사흘 뒤, 반대매매가 일어났습니다.

    너무 놀랐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감당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께서 불과 사흘 전에 기도하게 하셨던 그 말씀을 오히려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그때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때 나에게 살려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을까?”

    당시에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반대매매

    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반대매매가 이루어진 과정이었습니다.

    담보부족이 발생했고, 반대매매가 이루어질 수 있는 T+2 기준에 따라 나는 자기매도상환을 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담보부족을 해소하고 담보비율도 맞추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기록을 하나씩 살펴보니 이상한 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매도상환을 통해 담보부족이 해소되고 담보비율이 충족된 과정이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기록에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해하기 어려운 종목까지 반대매매가 강행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증권사의 소비자보호부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방문했을 때는 내가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듣지 못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다시 한 번 찾아갔습니다.

    소비자 보호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증권사 담당자의 입장에서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소비자 보호부로 부터 한 장의 자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자료가 그렇게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 장의 종이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료에는 담보부족과 T+2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기록을 하나씩 따라가다 보니 내가 자기매도상환을 통해 담보부족을 해소하고 담보비율을 맞추었던 과정과 실제 기록 사이에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하나씩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민사소송의 길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흔적

    하나를 찾으면 또 하나가 보였습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처음부터 모든 증거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떤 자료가 필요한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의 자료를 찾다 보면 그 안에서 또 다른 단서가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을 확인하다 보면 또 다른 자료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떤 자료를 찾았는데, 그곳에서 또 다른 단서가 발견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왜 여기에서 발견되었을까?”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를 확인하다 보니 다음 것이 보였고, 그것을 확인하다 보니 또 다른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하나씩 확인해 나갔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일이 정말 어디까지 가게 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민사소송의 과정에서 기도와 자료 발견, 금융감독원 민원, AI를 통한 질문과 소송 결정까지 한 걸음씩 인도하신 하나님의 흔적을 표현한 이미지

    금융감독원에 두 번 민원을 넣다

    그래서 금융감독원에도 두 번이나 민원을 제기했습니다.

    나는 객관적인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의 민원을 거치면서 오히려 답답함이 더 커졌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내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듣기보다 증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답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정말 막막했습니다.

    내가 가진 의문은 풀리지 않았고, 내가 확인한 자료와 설명 사이에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비용을 들여 변호사를 선임할 형편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많은 시간을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그렇게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뜻밖의 한마디

    그러던 어느 날 큰아이가 말했습니다.

    “맨날 네이버 검색만 하지 말고, 제미나이를 활용해 봐!”

    그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머리가 복잡한데 새로운 것을 배워서 해보라는 말이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속으로 그 말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결국 제미나이를 사용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ChatGPT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궁금한 것들을 하나씩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왜 이런가?”

    “이 기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부분은 어떻게 봐야 하는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다시 물었습니다.

    답을 들으면 또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게 질문하고 확인하는 과정이 계속되었습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95405

    질문하기 시작하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변화는 내가 모르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 자체가 막막했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를 물으면 하나를 알게 되었고, 하나를 알게 되면 또 다른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 질문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렇게 하나씩 확인하다 보니 내가 가지고 있던 자료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AI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준 것은 아닙니다.

    ChatGPT가 나를 대신해 소송을 한 것도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한 사람은 나였습니다.

    하지만 혼자서는 어디서부터 무엇을 확인해야 할지 막막했던 나에게 질문할 수 있는 도구가 생겼다는 것은 큰 변화였습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자료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고, 필요한 내용을 하나씩 확인하고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홀로 민사소송을 시작해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혼자 시작한 민사소송

    그렇게 소장을 준비했습니다.

    준비서면을 작성하고, 하나씩 증거를 정리했습니다.

    처음부터 법률을 잘 알았던 것도 아닙니다.

    법원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무엇인지, 어떤 내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도 하나씩 알아가야 했습니다.

    때로는 막막했고, 때로는 내가 과연 이 일을 끝까지 해낼 수 있을지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 자료를 펼쳐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물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기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내가 놓친 것은 없는가?”

    그렇게 한 걸음씩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합니다.

    반대매매가 일어나기 사흘 전에는 “살려 달라고 기도해라”​라는 말씀이 마음에 강하게 들어왔습니다.

    그때는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반대매매가 일어난 뒤에는 너무 놀라 그 말씀조차 잊었습니다.

    증권사에 찾아갔을 때는 답답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방문에서 받은 한 장의 종이가 중요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금융감독원에 두 번 민원을 넣었지만 내가 원하는 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뒤에는 뜻밖에도 큰 아이의 한마디를 통해 새로운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말조차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말이 마음에 남았고,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질문하면서 길을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하나하나의 사건은 별개처럼 보입니다.

    기도했던 일,

    반대매매가 일어난 일,

    두 번째 방문에서 자료를 받은 일,

    그 자료에서 단서를 발견한 일,

    금융감독원에 두 번 민원을 넣은 일,

    1년이 넘도록 답을 찾지 못했던 시간,

    그리고 큰아이의 한마디.

    당시에는 어느 것 하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일이 하나의 길처럼 이어져 있습니다.

    나는 길을 알고 걸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과정을 지나면서 한 가지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길을 알고 걸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그때 다음 한 걸음만 알았습니다.

    기도했고,

    기다렸고,

    찾았고,

    발견했고,

    또 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한 걸음을 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모두 보여주셨다면 아마 나는 덜 두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주셨습니다.

    한꺼번에 모든 답을 보여주시기보다 그때 필요한 만큼만 보여주셨습니다.
    한 번에 다 보여주셨더라면, 어쩌면 저는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잘 아시기에, 한 걸음 씩 인도해 주셨습니다.

    다음 한 걸음을 걸으면 또 다른 길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이 모든 과정을 단순히 민사소송의 과정으로만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직 이 소송의 최종 결과도 알 수 없습니다.

    판결이 어떻게 내려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와 상관없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서 분명히 발견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답을 한꺼번에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다음 한 걸음을 걸을 수 있도록 하나씩 길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엄마도 몰라서 묻는다」와 이어지는 이야기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는 내가 이전에 썼던 **「엄마도 몰라서 묻는다」**라는 글과도 연결됩니다.

    나는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하나님께 물었고,

    내가 가진 자료를 찾아보았고,

    궁금한 것을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모르는 것이 부족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묻기 시작했을 때, 다음 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질문한다고 해서 모든 답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질문하지 않으면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모르는 것이 생기면 무조건 두려워하기보다 먼저 묻습니다.

    그리고 확인합니다.

    다시 생각합니다.

    필요하다면 또 질문합니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다음 한 걸음을 찾습니다.

    아직 마지막 장면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 이 길의 마지막은 모릅니다.

    민사소송의 결과도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바라는 결과가 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과정을 돌아보면서 한 가지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나는 혼자 걸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매매가 일어나기 사흘 전의 그 기도도,

    뜻밖에 손에 들어온 한 장의 자료도,

    그 자료에서 발견된 단서도,

    두 번의 민원도,

    2년이 넘는 기다림도,

    큰아이의 뜻밖의 한마디도,

    그리고 질문을 통해 하나씩 길을 찾아간 시간도,

    지금의 나에게는 모두 하나의 과정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왜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

    왜 이렇게 많은 자료를 찾아야 하는지,

    왜 내가 직접 이 모든 것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길 전체를 볼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다음 한 걸음을 걸을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은 또 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길의 마지막을 억지로 알려고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한 걸음을 걸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한 걸음이 보이면 또 걸으려고 합니다.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나는 길을 다 알고 걸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그때 다음 한 걸음만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다음 길을 볼 수 있도록 조금씩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믿고 싶습니다.

    내가 아직 보지 못하는 길에도 하나님은 이미 계신다고.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나는 하나님과 함께 그 길을 걷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통로로 부를 허락하시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통로로 부를 허락하시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떤 통로로 부를 허락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부를 생각하면 먼저 돈을 떠올립니다.

    얼마를 벌었는지,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집에 사는지, 어떤 차를 타는지, 얼마나 좋은 투자를 했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도 부에 대한 생각은 쉽게 두 극단으로 나뉩니다.

    한쪽에서는 “하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물질적인 복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다른 한쪽에서는 “돈과 부를 가까이하는 것은 신앙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성경이 말하는 부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반드시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증거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어떻게 얻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의 궁극적인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노력으로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열심히 일했고, 공부했고, 기술을 익혔고, 좋은 기회를 잡았고, 투자해서 수익을 냈으니 모두 내가 만들어 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노력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노력할 수 있는 건강과 능력도 내가 처음부터 만들어 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재능과 지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환경, 그리고 때를 따라 찾아오는 기회 역시 모두 내가 계획해서 만들어 낸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부를 만들어 냈다고 자랑하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신명기 8장 18절은 하나님께서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이 말씀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돈을 보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할 능력과 생각할 지혜, 기회를 활용할 힘과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를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은 돈에 대한 우리의 관점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벌었는가?”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맡기셨는가?”로 시선을 옮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 통로를 사용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떤 통로를 통해 필요한 것을 공급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방법만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직장을 통해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기술과 재능을 통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을 통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면서 소득을 얻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오랜 시간 공부하고 전문성을 쌓은 뒤 그 능력을 통해 더 넓은 기회를 얻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대가 변하면서 투자와 자산 관리 역시 우리가 경제생활을 하는 하나의 방법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통로인가보다 그 통로를 누가 열었고, 나는 그것을 어떤 마음으로 사용하고 있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방식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 이미 존재하는 여러 통로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일할 기회를 주시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하기도 하며, 생각하지 못했던 공부의 기회를 열어 주기도 합니다.

    때로는 내가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분야를 알게 하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훗날 돌아보면 당시에는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갔던 일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길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일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부의 통로 가운데 하나는 입니다.

    우리는 일을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일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능력으로 누군가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소득을 얻는 과정 역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질서 안에 있습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도 그렇고, 자신의 기술로 일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실하게 일하고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며 다른 사람에게 가치를 제공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하나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를 이야기할 때 단순히 “얼마를 벌 것인가?”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질문도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왜 같은 말씀을 여러 번 하실까?



    재능과 전문성도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재능을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글을 잘 쓰고, 어떤 사람은 손재주가 뛰어나며, 어떤 사람은 사람을 잘 돌봅니다.

    어떤 사람은 숫자에 강하고, 어떤 사람은 새로운 사업의 기회를 발견하는 데 능숙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오랜 시간 한 분야를 공부하여 전문적인 지식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재능과 지식은 단순한 개인의 자산에 그치지 않습니다.

    잘 사용하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동시에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소득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단순히 성공하기 위한 노력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잘 관리하는 청지기의 태도일 수도 있습니다.

    사업과 투자도 무조건 배척할 대상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사업과 투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돈과 투자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업이나 투자라는 행위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안에 들어 있는 탐욕과 욕심, 정직하지 못한 방법, 지나친 위험 감수와 돈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투자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탐욕스러운 것도 아니고,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돈을 바라보는 마음과 그것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투자는 미래를 위해 자산을 관리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투자에는 언제나 위험이 존재합니다.

    수익을 얻을 수도 있지만 손실을 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투자하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수익을 보장받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믿음이라기보다 때로는 자신의 욕심을 신앙으로 포장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위험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위험이 존재하는 현실 속에서도 지혜롭게 판단하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61074

    하나님이 주시는 부와 내가 원하는 부는 다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부와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시는 부가 반드시 같지는 않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많은 돈을 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먼저 절제를 배우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나는 더 큰 수익을 원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손실을 통해 욕심을 돌아보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나는 빠른 성공을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랜 시간 성실함을 배우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돈을 얻는 것보다 돈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이해할 때는 결과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얼마나 벌었는가?”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부는 축복이면서 동시에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기신다면 그것은 단순히 더 편안하게 살라는 의미만은 아닐 것입니다.

    더 많이 가진 사람에게는 더 큰 책임도 따릅니다.

    내가 가진 돈으로 가족을 돌볼 수 있고,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도 있으며, 누군가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부의 개념에는 나눔과 책임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돈이 많다는 사실이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얼마나 정직하고 지혜롭게 관리했는지가 중요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라도 돈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소유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를 허락하실 때 우리가 배워야 할 것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경제적인 기회를 열어 주실 때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먼저 감사를 배워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이 모두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분별을 배워야 합니다.

    좋은 기회처럼 보인다고 해서 모두 붙잡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절제를 배워야 합니다.

    더 많이 벌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기다림도 배워야 합니다.

    부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경우보다 오랜 시간 성실하게 쌓이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눔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나를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은 이미 길을 열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삶에는 이런 순간들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시간이 지난 후 돌아보니 하나의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된 일,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 일, 예상하지 못했던 공부를 하게 된 일, 새로운 금융상품을 알게 된 일, 투자라는 세계를 접하게 된 일도 그렇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지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뒤돌아보면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때부터 나를 어떤 길로 인도하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물론 모든 일이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었다고 섣불리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의 선택과 실수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과 부족함까지도 사용하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성숙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지나온 모든 일을 억지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셨는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돈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결국 부에 대한 신앙적인 질문은 이것으로 모아집니다.

    “하나님은 나를 얼마나 부자로 만들어 주실 것인가?”

    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나는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돈은 우리의 삶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서도 필요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때로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돈 자체를 죄악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돈이 하나님보다 앞서게 되는 순간 우리는 돈을 섬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돈을 갖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돈을 가지고도 돈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려 합니다

    이제부터 나는 조금 더 개인적인 이야기를 기록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부를 허락하시는 통로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나에게도 하나의 특별한 통로가 열렸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거창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식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남편이 어느 날 주식이 꼭 나쁜 것 만은 아닌 것 같다며 아주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냅니다. 아이들 결혼 준비도 해야 하는 부담감에 조금이라도 투자를 해서 돈을 모으고 싶은 마음에서 주식을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가 생긴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전 부터 주식을 부정적으로 바라 보지 않았으나, 남편이 부정적이었고 또 투자를 할 만한 상황이 못되었기에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주식에 대한 편견이 사라진 남편과 아주 조금 투자를 해 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본격적으로 자연스럽게 주식이라는 금융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새로운 것을 배우고 경험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과정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을 지나면서 나는 투자에 대해 배우게 되었고, 돈에 대한 나의 생각도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상하지 못했던 큰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반대매매였습니다.

    그 사건은 나에게 단순한 투자 손실이 아니었습니다.

    돈을 바라보는 시선, 금융회사를 바라보는 시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가지 질문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주식을 접하도록 길을 여셨다면, 왜 그 길의 끝에서 이런 어려움을 만나게 하셨을까?”

    아마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 번에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하나씩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벌었던 이야기를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투자를 잘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한 사람이 돈과 투자, 손실과 고난을 지나오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그 과정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를 허락하시는 가장 중요한 통로는 돈 그 자체가 아니라, 돈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다듬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게 하시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내가 경험했던 이야기를 이제 다음 글부터 하나씩 꺼내 보려고 합니다.

  •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말씀 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길이 맞는 걸까요?”

    “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나는 건가요?”

    “하나님은 정말 제 기도를 듣고 계신가요?”

    때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기도해도 상황은 그대로이고, 기다려도 변화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다만 내가 그 말씀을 알아 듣지 못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가장 분명한 통로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던 한 구절이 어느 날 유난히 마음에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같은 말씀인데도 어떤 날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가, 내가 가장 힘든 순간에 읽으면 마치 하나님께서 바로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게 맡기라.”

    “기다리라.”

    말씀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나의 상황과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조금씩 알아가고, 내가 가고 있는 길을 돌아보게 됩니다.

    때로는 위로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책망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내가 원하는 답과 전혀 다른 말씀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때부터 진짜 믿음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말씀하신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말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습니다.

    억울한 일도 이야기하고, 두려움도 이야기하고, 원하는 것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오래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달라집니다.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해 달라고 말씀드리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기다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답을 빨리 얻고 싶습니다.

    “하나님, 이것을 해결해 주세요.”

    “하나님, 이 길을 열어 주세요.”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려 주세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과 시간에 답하지 않으실 때가 많습니다.

    대신 우리의 마음을 먼저 바꾸십니다.

    상황은 그대로인데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기도 하고, 내가 붙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게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런 마음이 생깁니다.

    “조금 더 기다려 보자.”

    “내가 판단하지 말자.”

    “하나님께 맡기자.”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통로로 부를 허락하시는가?

    *민사소송의 길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흔적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의 꿈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사람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주시거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셉에게 주셨던 꿈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어떤 꿈은 유난히 선명하게 기억에 남을 때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꿈을 꾸어도 금방 잊어버리는데, 어떤 꿈은 잠에서 깬 뒤에도 이상하리만큼 마음에 남습니다. 때로는 그 꿈 때문에 하루 종일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 꿈속에서 보았던 장면이나 말이 오랫동안 기억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꿈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가져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혹시 이 꿈을 통해 제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뿐만 아니라 잠든 시간에도 우리의 마음을 다루실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꿈을 통해 떠올리게 하시고, 잊고 있던 일을 다시 생각하게 하시며,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위해 기도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모든 꿈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겠지만,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말씀하신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꿈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기도로 가져가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잠든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깨우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도 말씀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훗날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도 나에게 말씀하고 계셨구나.”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61074

    하나님은 사람과 사건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책을 펼쳤을 때만 들려오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한 사람의 말 한마디를 통해 마음에 무언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때로는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을 통해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어떤 만남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오고, 어떤 사건은 나를 멈추게 하기 위해 찾아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왜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건을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 그래서 그때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그곳에 머물게 하셨구나.”

    “내가 그때는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셨구나.”

    물론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고, 그 안에서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은 기다림 속에서도 말씀하신다

    가장 어려운 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답을 듣는 것보다 답이 늦어지는 것을 더 힘들어합니다.

    특히 이미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다고 생각할 때 그렇습니다.

    기도했고, 노력했고, 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하나님께 묻게 됩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하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상황을 먼저 바꾸지 않으시고 사람을 먼저 바꾸십니다.

    상황을 해결하기 전에 우리의 믿음을 준비시키십니다.

    문을 열어주시기 전에 그 문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원하는 말과 다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생각과 같은 말씀을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내가 원하는 길이 열리기를 기대하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변화되기를 바라며, 내가 원하는 결과를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분으로만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에게

    “멈추라”고 말씀하시고,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시며,

    “용서하라”고 말씀하시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내려놓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고 계신다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는 한 번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통해 말씀하셨고,

    기도 가운데 말씀하셨으며,

    사람을 통해 말씀하셨고,

    사건을 통해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다림 속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그때의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무 큰 소리로만 찾았던 것 같습니다.

    특별한 표적이나 분명한 음성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주 조용하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말씀 한 구절을 통해,

    마음에 주시는 작은 깨달음을 통해,

    누군가의 말 한마디를 통해,

    뜻밖의 사건을 통해,

    그리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기다림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께 묻게 됩니다.

    “하나님,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 질문이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셔서 답답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있는지를 먼저 돌아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기도를 통해 마음을 만지시며,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수많은 일을 통해 우리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입니다.

    그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믿고,

    기다리고,

    순종하며,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나온 모든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미처 알아듣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다시 조용히 하나님 앞에 서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말씀해 주세요.
    제가 듣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이라도
    주님을 신뢰하며 따라가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오늘도 우리의 삶을 향하고 있습니다.

  • 내면의 치유 ① | 치유-상처로 얼룩진 내면

    내면의 치유 ① | 치유-상처로 얼룩진 내면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상처와 치유를 경험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들었던 말 한마디,
    친구에게 받은 배신,
    가족과의 갈등, 가난
    직장에서의 무시와 억울함, 따돌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그리고 사별,
    실패와 좌절….

    이러한 경험들은 시간이 지나면 잊힌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마음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면 오래전에 받았던 상처가 다시 떠올라서
    자신도 모르게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같은 말에도 쉽게 마음이 무너지고,
    작은 일에도 지나치게 화가 나거나,
    사람을 믿지 못하는 편견이 생기기도 합니다.

    상처는 단순히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움직이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상처가 시간만으로 치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인 상처의 원인이 해결되지 않으면 상처는 치유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보다 먼저 우리의 마음을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아픔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그 정도는 별것 아니야.”라고 말하기도 하고,
    오히려 상처를 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더욱 힘들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 한 방울도 헛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상한 마음을 가까이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34:18)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밤에 흘린 눈물도 알고 계시고

    말하지 못한 아픔도 알고 계십니다.

    감추어진 상처도 알고 계시며

    그리고 그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상처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 합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점점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사람을 믿지 못하게 만들고,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며,

    늘 비교하고 탓 하게 만들며, 변명하고 합리화 하게 합니다.

    그리고는 열등감과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게 합니다.

    또한 분노와 미움은 또 다른 상처를 만들기도 합니다.

    상처 받은 사람이 그 상처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도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의 환경만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의 방향이 인생을 결정합니다


    *https://kr.christianitydaily.com/articles/132541/20260803/%EC%95%84%EB%B2%84%EC%A7%80%EA%B0%80-%EC%82%B4%EC%95%84%EC%95%BC-%EA%B0%80%EC%A0%95%EC%9D%B4-%EC%82%B0%EB%8B%A4-%EB%91%90%EB%9E%80%EB%85%B8-%EC%95%84%EB%B2%84%EC%A7%80%ED%95%99%EA%B5%90-%EC%8B%9C%EC%95%A0%ED%8B%80-51%EA%B8%B0-%EC%B0%B8%EA%B0%80%EC%9E%90-%EB%AA%A8%EC%A7%91.htm

    치유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한 번 기도하면 모든 상처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시간을 통해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말씀으로,

    기도로,

    예배로,

    성령님의 위로로,

    좋은 공동체를 통해,

    조금씩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마치 겨울이 지나 봄이 오듯이,

    회복도 하나님의 때를 따라 찾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상처를 맡길 때 진정한 자유가 시작됩니다

    우리 힘으로는 모든 상처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용서도 쉽지 않고,

    잊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솔직히 내어드릴 때 치유는 시작됩니다.

    기도는 상처를 숨기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시간입니다.

    눈물도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침묵도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가장 잘 아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상처까지 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우리의 죄만 담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조롱받으셨고,

    버림받으셨으며,

    배신당하셨고,

    고통과 슬픔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아픔을 이해하십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용서뿐 아니라 회복의 시작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도록 내버려 둘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받은 치유와 회복을 다른 사람과 나누며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공동체를 표현한 이미지

    우리의 회복은 또 다른 사람을 살리는 통로가 됩니다

    치유를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받은 위로를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헛되게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회복된 마음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믿음이 되며,

    다시 일어설 용기가 됩니다.


    맺음말

    혹시 지금도 오래된 상처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습니까?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도 마음 한편이 무너져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두 손을 내밀며 말씀하십니다.

    “내게 나오라.”

    우리의 상처는 하나님께 숨겨야 할 것이 아니라 맡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메마른 우리의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며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함께 묵상할 말씀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에스겔 36:26)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제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상처를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사람에게 받은 아픔과 스스로를 정죄했던 마음까지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메마른 제 영혼에 주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미움 대신 사랑을, 두려움 대신 평안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제 삶이 치유의 은혜를 경험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에필로그

    상처는 우리의 인생을 정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상처는 회복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내면의 치유 ② | 용서하지 못한 마음,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을까?”를 통해 용서와 회복의 실제적인 여정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 내면의 치유 시리즈 ②

    내면의 치유 시리즈 ②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도 치유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용서하지 못할까요?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는 시간이 지난다고 모두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은 원망이 되고, 분노가 되고, 마음속에 단단한 벽을 만들기도 합니다.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왜 나를 그렇게 대했을까?”
    “나는 아직도 그 일을 잊을 수 없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이러한 기억은 우리의 마음을 계속 괴롭히고 무겁게 붙잡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용서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용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상처가 깊을수록, 배신이 클수록, 억울함이 클수록 우리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단순히 “용서하라”고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의 상처, 상한 감정을 치유하시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새롭게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감정보다 먼저 믿음에서 시작되는 일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마음이 풀리면 하겠다.”

    하지만 성경은 조금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감정이 모두 해결된 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은 아직 아플 수 있습니다.

    눈물이 날 수도 있습니다.

    억울한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아시며,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한 걸음 씩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도
    함께 치유해 가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힘으로 순종이 어려워 힘들어 하는 자들의 중심을 보시고, 우리의 상한 감정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억압에서 자유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 제작: (ChatGPT)AI 생성 지이미지

    하나님을 깊이 알수록 은혜는 커집니다

    우리는 모두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살아오면서 수없이 하나님 앞에 잘못했고, 넘어졌으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셨고, 갚을 수 없는 사랑을 허락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시선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나도 이렇게 복음에 빚진 자인데…’

    이 깨달음은 억지로 참는 마음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행동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잘못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내 마음을 붙잡고 있던 미움과 원망을 하나님께 맡기는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의 임재 안에서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게 되면 부정적인 마음에 자신을 내 맡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상한 감정을 맡겼을 때 누리게 되는 참 평안을 알게 되면
    오히려 주님의 사랑을 더욱 알고 싶은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정의와 심판을 맡기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영혼은 왜 중요할까요?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57717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결국 나 자신을
    더 아프게 합니다

    원망은 상대방보다 먼저 내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미움은 생각을 지배하고,

    분노는 평안을 빼앗으며,

    복수심은 우리의 영혼을 지치게 만듭니다.

    겉으로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마음속에서는 과거의 상처를 반복해서 떠올리며 스스로를 괴롭히게 됩니다.

    용서하는 순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대를 위한 일이기 전에 나 자신의 자유를 위한 일 입니다.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조금씩 회복시키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까지
    치유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 마음부터 변화 시켜 주십니다.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했던 상처,

    오랫동안 품어 왔던 원망,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눈물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품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아픔을 내려놓을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조금씩 부드럽게 하십니다..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부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순종을 통해 우리의 내면을 새롭게 변화 시켜 주십니다.


    용서는 치유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용서는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닙니다.

    과거의 상처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치유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 뿐 아니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치유하시고 억압에서 자유 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솔직히 내어 드려 보십시오.

    “하나님, 제 안에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만들어 주십시오.”

    하나님은 그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자유하게 하시며, 참된 평안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함께 묵상해 보세요

    • 지금도 내 마음속에 놓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해 보세요!

    마무리하며

    용서는 인간의 의지 만으로 완성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조금씩 배워 가는 삶의 과정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회복시키시는 치유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통 속에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 하나님은 왜 같은 말씀을 여러 번 하실까?

    하나님은 왜 같은 말씀을 여러 번 하실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함없이 말씀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민수기 23:19)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은 제 삶 가운데 오랜 시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한결같이
    말씀하셨는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출처 : 페이스북 저장 글



    2015년 겨울
    잊을 수 없는 한 꿈


    2015년 12월 19일

    며칠 전에 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땅 위에서 보니 맨홀 같은 웅덩이가 있어서 내려다 보니
    그 곳은 아주 커다랗고 넓고 깊은 구덩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마치 해발 고도가 832m에 이르고 총 고개의 연장 길이가 13km 이며
    99개의 고개의 굽이가 있는 대관령 고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봤을 때와 같은..

    그런 깊은 곳 아래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던 시간 때 부터 엄청나게 큰 구렁이가 빠른 속도로 땅 위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비록 꿈 속이었지만 너무 놀라서 지금도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깊은 아래에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구렁이가 쉭쉭 소리를
    내며 올라오고 있었는데,
    두 바퀴 정도면 곧 땅 위로 올라올 기세였습니다.

    꿈속에서도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꿈 속이었지만 그 구렁이가 머지않아 땅 위까지 올라 오면
    모두가 죽는다 라는 느낌이 매우 강하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순간
    제 마음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절박하게 주님을 찾아야 할 때다.”

    꿈의 내용보다
    제 마음에 남겨 주신 이 한 문장이
    더 강하게 기억되었습니다.


    출처 : 페이스북 저장 글



    같은 말씀을 반복하시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계속 같은 방향으로 말씀하셨습니다.

    2016년에는 또 다른 꿈을 통해 여러 가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꿈 속에서는

    • 지휘권을 넘겨주지 말라는 의미
    • 연약한 사람을 돌아보라는 마음
    • 언제나 말씀하시는 분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라는 말씀
    • 사람을 부풀려 말하지 말라는 교훈

    등이 제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박근혜 전대통령의 탄핵을 미리 아시고
    제게 꿈으로 알려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의미를 모두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말씀하신 내용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분별력이 있는 자들은 본질을 추구합니다 – 현상이 아닌 진실을 바라보는 성경적 분별력의 원리



    *왜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즉시 해결하지 않으실까? 기다림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


    출처 : 페이스북 저장 글




    그리고 2026년…

    올해 1월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성령께서 제 마음에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라!”

    그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라!”

    다시 한번,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라!”

    그 순간 제 마음에는 한 가지 확신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주님께서 하실 일의 목적은
    어떤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시는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35738

    하나님은 언제나 일관되게 말씀하십니다

    뒤돌아보면 단 한 번도 서로 다른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말씀도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그림처럼 연결되었습니다.

    성경도 그렇습니다.

    요셉은 바로의 두 번의 꿈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알았습니다.

    사무엘은 여러 번 들려오는 음성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았습니다.

    선지자들도 같은 메시지를 여러 차례 반복하여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도하시며 때가 되면 깨닫게 하시는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사건과 뉴스를 접합니다.

    사회도 흔들리고,
    정치도 흔들리며,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게 오랫동안 가르쳐 주신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꿈의 마지막에 남겨진 마음도,

    성령께서 주신 말씀도,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더욱 찾으라.”

    그리고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라.”

    이것이 제게 계속해서 말씀하신 핵심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믿습니다.

    때로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가장 정확한 때에 일하십니다.

    그리고 뒤돌아보면,

    그 모든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말씀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맺음말

    저는 앞으로도 사람을 드러내기보다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사람을 바라보게 하지만,

    성령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라.”

    그 이름만이 소망이며,

    그 이름만이 영광을 받으실 이름입니다.

    신실하신 예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 함께 묵상할 말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영원하도다.”
    (시편 100:5)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브리서 13:8)

    “그는 미쁘시니 그 약속하신 이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10:23)

  • 청빈과 빈곤은 같은 것일까?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청빈의 의미

    청빈과 빈곤은 같은 것일까?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청빈의 의미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청빈의 의미

    “청빈은 가난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빈곤은 결핍이지만, 청빈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가난하게 사셨으니 우리도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돈이 많으면 신앙생활 하기 어렵다.”

    “청빈하게 사는 것이 곧 거룩한 삶이다.”

    이 말들은 얼핏 들으면 매우 신앙적인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정말 성경은 가난을 이상적인 삶으로 가르치고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청빈(淸貧)빈곤(貧困)을 같은 의미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둘을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이 둘을 혼동하면 신앙뿐 아니라 경제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왜곡이 생길 수 있습니다.


    청빈과 빈곤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사전적으로 청빈은 맑을 청(淸), **가난할 빈(貧)**이라는 글자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단순히 돈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청빈은 욕심에 얽매이지 않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태도입니다.

    반면 빈곤은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의 경제적 결핍 상태를 말합니다.

    두 단어 모두 ‘가난’이라는 표현이 들어가지만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은 큰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검소하게 살고 이웃을 위해 기꺼이 나눌 수 있습니다. 그는 청빈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가진 것은 많지 않지만 늘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고 돈에 대한 욕심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다면 그는 청빈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청빈은 재산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적 경제관, 하나님의 사람은 경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 AI 생성 이미지 (제작: ChatGPT)

    왜 사람들은 청빈과 빈곤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오해는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 역사 속에는 금욕주의와 수도원 운동이 등장했습니다. 세속의 욕망을 멀리하기 위해 많은 수도사들이 재산을 포기하고 소박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존경받을 만한 것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소유를 적게 하는 것’과 ‘거룩함’을 동일시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동양 문화권의 검소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전통이 더해지면서, ‘청빈하게 산다’는 말이 곧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가난 자체를 거룩함의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경제 활동을 계획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를 세속적인 영역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처음부터 읽어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이 말씀에는 생산과 관리, 노동과 책임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동산을 돌보고 이름을 짓고 관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즉 경제 활동은 인간의 타락 이후 생겨난 것이 아니라 창조 질서 속에 포함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노동은 저주가 아니라 사명이었고, 자원을 관리하는 일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청지기적 책임이었습니다.


    성경은 빈곤을 미화하지 않는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들을 깊이 사랑합니다.

    하지만 가난 자체를 이상적인 상태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다양한 제도를 마련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추수 후 밭의 이삭을 남겨 두어 가난한 사람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한 이삭 줍기 제도가 있었습니다.

    또한 희년에는 빚으로 잃었던 땅이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도록 하셨고, 십일조의 일부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이 모든 제도는 한 가지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셨고, 그들이 빈곤에서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만약 빈곤 자체가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삶이었다면 이런 제도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자를 미워하셨을까?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장면만 보면 예수님께서 부를 부정적으로 보신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 역시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루디아는 자주 옷감을 판매하던 사업가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욥, 다윗과 솔로몬도 모두 큰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 자체를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재물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것은 부자가 아니라 탐욕이었습니다.

    *https://www.christiandaily.co.kr/


    돈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돈은 칼과 같습니다.

    의사가 칼을 사용하면 생명을 살립니다.

    범죄자가 칼을 사용하면 사람을 해칩니다.

    칼 자체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으로 병원을 세울 수도 있고 학교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도 있고 복음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돈으로 사람을 속이고 탐욕을 채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하지, 돈 자체가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경제를 소홀히 하면서 생긴 문제

    안타깝게도 오늘날 일부 교회에서는 경제를 배우는 것을 세속적인 일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결과 성도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금융과 경제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잘못된 투자에 쉽게 흔들리고, 사기나 과도한 빚의 위험에도 노출될 수 있습니다.

    또한 돈을 무조건 멀리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직업과 노동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세상을 떠나 살아가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하라고 말씀합니다.

    경제 역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삶의 한 영역입니다.


    진정한 청빈은 자유로운 삶이다

    청빈은 가진 것이 적다는 뜻이 아닙니다.

    돈이 있어도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사람.

    돈이 없어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

    필요 이상의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책임 있게 사용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청빈한 사람입니다.

    청빈은 절제가 아니라 자유입니다.

    돈을 사용할 줄도 알고, 내려놓을 줄도 아는 사람.

    재물이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삶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한 청빈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실천해야 할 청빈

    현대 사회에서 청빈은 특별한 수도원의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다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 필요 이상의 소비를 줄이는 삶
    • 빚을 내어 허세를 부리지 않는 삶
    • 돈보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삶
    • 재물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청지기의 관점으로 사용하는 삶
    • 어려운 이웃을 기꺼이 돕는 삶
    • 성공보다 정직을 선택하는 삶
    • 부를 자랑하지 않고 감사로 살아가는 삶

    이러한 삶은 재산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누구나 실천할 수 있습니다.


    맺음말

    청빈과 빈곤은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은 전혀 다릅니다.

    빈곤은 극복해야 할 현실입니다.

    청빈은 지켜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난을 목표로 삼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맡기신 시간과 재능, 재물과 기회를 지혜롭게 관리하는 청지기가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가난을 미화하거나 부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극단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물을 선하게 사용하며 이웃을 섬기는 균형 잡힌 삶입니다.

    청빈은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가진 것에 묶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는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말씀 묵상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신명기 8:18)

    재물을 얻는 능력 또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그 소유를 누구를 위해 어떻게 사용하는가입니다.

  • 성경적 경제관, 하나님의 사람은 경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성경적 경제관, 하나님의 사람은 경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성경적 경제관,
    그리스도인은 돈과 경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경제를 이야기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불편함을 느낍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는 돈이나 투자, 저축, 부동산과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면 세속적이라는 시선을 받기도 합니다.

    반대로 세상은 돈이 인생의 성공을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은 경제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까요?

    성경은 경제를 무시하지도 않고, 돈을 인생의 목적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경제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하고 관리하기를 원하십니다.



    경제는 하나님이 만드신 질서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부터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노동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였습니다.

    경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씨를 뿌리면 거두고, 수고하면 열매를 맺으며, 지혜롭게 관리하면 삶이 안정되는 원리는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 허락하신 질서입니다.

    경제를 이해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경제를 배우되 경제를 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경제를 멀리하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돈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돈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경제는 배워야 합니다.


    • AI 생성 이미지 (제작: ChatGPT)
    하나님이 주인이신 경제 청지기의 삶

    야곱에게 배우는 경제의 지혜

    야곱은 라반과의 계약 속에서 자신의 품삯을 지혜롭게 관리했습니다.

    아롱지고 점 있는 가축을 구별하여 자신의 몫으로 삼았고, 오랜 목축 경험과 지혜를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의 성공을 자신의 능력으로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야곱은 계획했지만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노력했지만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경제활동과 믿음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함께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37927


    성경적 경제관을 오해할 때 세상은 교회를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경제생활 역시 세상이 바라보는 신앙의 한 모습이 됩니다.

    안타깝게도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 경제관을 오해하여 오히려 세상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있으면 돈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경제생활은 무질서하게 살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청지기”를 말하면서도 맡겨진 재정을 계획 없이 사용합니다.

    반대로 교회 밖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며 “말과 삶이 다르다.”는 평가를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가게에서 물건을 구입하면서 무리하게 값을 깎아 달라고 요구하거나, 상대방의 형편은 고려하지 않은 채 ‘교회 다니는 사람이니까 조금 더 싸게 해 달라’는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은 성경적 경제관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성경은 정직한 거래와 공정한 저울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상대를 힘들게 해서 내가 이익을 얻는 것은 청지기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많이 얻는 사람이 아니라, 더 신뢰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경제생활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의 예배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비와 거래, 약속을 지키는 태도까지도 함께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적 경제관은 돈을 적게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돈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청빈과 빈곤은 다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물질에 욕심이 없는 삶을 추구합니다.

    그 자체는 아름다운 가치입니다.

    그러나 청빈과 빈곤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청빈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삶입니다.

    빈곤은 삶의 선택권을 잃고 경제적 압박 속에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성경은 청빈을 귀하게 여기지만 빈곤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미화하지 않습니다.

    잠언 30장에서 아굴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이 기도는 성경적 경제관의 균형을 잘 보여 줍니다.



    우리는 선한 청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단지 돈만이 아닙니다.

    시간도,

    재능도,

    가정도,

    건강도,

    경제도 모두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제를 배우는 것은 탐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청지기 정신을 배우는 것입니다.

    돈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이루기 위한 도구입니다.



    맺음말

    오늘날 우리는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한쪽은 돈이 모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한쪽은 경제를 말하는 것 자체를 세속적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경제는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재물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관리하도록 부름받은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경제를 이해하지만 경제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돈을 사용하지만 돈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것을 지혜롭게 관리하며, 모든 공급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끝까지 신뢰하는 사람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청지기입니다.


    핵심 말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4)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잠언 30:8~9)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창세기 31:9

  • 분별력이 있는 자들은 본질을 추구합니다

    분별력이 있는 자들은 본질을 추구합니다

    현상이 아닌 진실을 바라보는 사람은
    분별력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정보와 선택 속에서 살아갑니다. 뉴스, SNS, 유튜브, 사람들의 말과 평가가 끊임없이 우리의 생각을 흔듭니다. 문제는 이러한 정보들이 언제나 진실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전달할 뿐, 그 이면에 있는 본질까지 보여 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마지막 때를 준비하며 살아가도록 분별력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분별력이란 단순히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머무르지 않고 그 안에 숨겨진 원인과 목적,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영적인 안목입니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말이나 분위기에 휩쓸리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상보다 본질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엄마도 몰라서 하나님께 묻는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가? 삶의 마지막에서 발견하는 가장 중요한 진실


    현상은 결과이지만 본질은 원인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쉽게 봅니다.

    누군가는 성공했고,
    누군가는 실패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존경을 받고,
    어떤 사람은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이미 나타난 결과일 뿐입니다.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결과만 보고 판단합니다.

    “운이 좋았네.”

    “실력이 없었네.”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

    하지만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다른 질문을 합니다.

    “왜 그런 결과가 나타났을까?”

    “그 사람은 어떤 선택을 반복했을까?”

    “그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이처럼 분별력은 결과보다 원인을 찾게 만듭니다.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가가 오르거나 내리는 것은 결과입니다. 그 뒤에는 기업의 실적, 시장의 유동성, 투자 심리, 정책 변화 등 다양한 원인이 존재합니다. 현상만 따라가면 흔들리지만 본질을 이해하면 시장을 더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참석 횟수가 많다고 반드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중심이 하나님께 향해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헌금을 많이 한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본질을 보는 지혜, 현상이 아닌 본질을 바라보는 통찰을 상징하는 이미지

    출처 :OpenAI (ChatGPT)를 활용해 제작


    하나님은 언제나 중심을 보십니다

    사무엘은 다윗의 형들을 보았을 때 가장 크고 잘생긴 엘리압을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은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중심을 보십니다.

    겉모습은 꾸밀 수 있지만 중심은 속일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 시간보다 기도의 진실함이 중요하고,

    헌금의 크기보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중요하며,

    사역의 규모보다 순종하는 중심이 더 중요합니다.

    본질은 언제나 중심에서 시작됩니다.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62807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유행보다 진리를 선택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말합니다.

    빠른 성공,
    쉬운 방법,
    즉각적인 결과를 약속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다릅니다.

    씨를 뿌리고,

    기다리고,

    인내하며,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잠시 반짝이는 유행보다 오래 지속되는 진리를 선택합니다.

    그들은 화려한 포장보다 내용이 충실한 것을 선택하고, 많은 사람들의 박수보다 하나님의 인정받는 삶을 더 귀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은 삶의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본질을 붙드는 사람은 기준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바뀌어도,

    환경이 달라져도,

    형편이 어려워져도,

    삶의 방향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준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찾아와도 먼저 하나님께 묻고,

    성공을 경험해도 교만하지 않으며,

    실패를 만나도 쉽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고 계신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분별력이 만들어 내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본질을 보는 눈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접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실을 분별하기는 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만 믿는다면 우리는 쉽게 속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분별력을 배우면 현상에 휘둘리지 않고 본질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람보다 중심을 보고,

    결과보다 과정을 살피며,

    문제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삶.

    그러한 삶이 결국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삶입니다.

    맺음말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화려한 기준보다 하나님의 기준을 선택합니다.

    그들은 겉모습보다 중심을, 결과보다 원인을, 현상보다 본질을 바라봅니다.

    이러한 분별력은 타고나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 안에서 자라나는 영적인 지혜입니다.

    우리가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할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그때 우리는 눈앞의 상황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본질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현상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지만, 본질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